살아온 이야기 (28) 썸네일형 리스트형 청소과 발령 1993년 1월 9일 청소과로 발령이 났다. 시청에 들어온 지 1년 3개월만이다. 비상대책과에 있을 때 주사보(7급)가 되었지만 청소과에 들어가자 시선이 달랐다. 일을 좀 하는 직원이 왔다는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내 평가표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과는 손꼽히는 격무부서였다. 연말 각 과에서 종무식을 벌이면 시장은 격무부서 몇 군데를 돌면서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때마다 교통기획과와 청소과는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과에서 나는 6년 7개월을 보냈다. 시청 직원들은 통상 3년 내외로 부서를 옮긴다. 나처럼 한곳에서 오래 근무한 기록은 시청 내를 통틀어도 드물지 싶다. 청소과는 쓰레기 처리를 담당하는 청소행정계와 분뇨처리를 하는 오수분뇨계, 쓰레기 매립장 건설을 하는 청소시설계가 있었다. 우리 과장은.. 부산시청에 들어가다 도로사업소에 근무한 지 3년 9개월만인 1991년 10월 17일 부산시청 민방위국 비상대책과로 발령이 났다. 비상대책과는 전시행정계획을 수립하고 전시훈련을 실행하는 것이 주기능이었다. 각 부서의 전시계획을 검토하고 타당성을 검증했다. 예를 들면 건설국에서는 전시에 민간인의 덤프트럭을 동원해야 하고, 보사국에서는 전시에 운영할 진료실을 사전에 지정하고 관리해야한다. 이러한 전시계획을 관리하면서 을지연습이나 전시합동훈련도 주관했다. 그때만 해도 5공 시대라 군부 입김이 거셌다. 민방위국장에는 예비역 대령이 임명되었고 지역사단훈련에는 시청 간부들도 참가해서 사단장에게 브리핑을 해야 했다. 중앙기획위원회라는 정부부서에서 예비역 장군들이 수시로 내려왔고 그때마다 칙사 대접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업무는 부산.. 여유가 있었던 도로사업소 도로사업소는 부산의 외곽지대인 회동수원지 주변에 있었다. 주기능은 부산시내 도로포장공사다. 사업소 내 아스콘 공장에서는 쉬지 않고 가동되었고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골재를 실은 덤프트럭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공사현장과 다름이 없었다. 부서로는 포장공사를 담당하는 도로과, 공사에 투입하는 굴삭기, 로우더 등의 장비를 운용하는 중기과, 인사, 서무와 계약을 담당하는 관리과가 있었다. 도로과에는 토목직, 중기과에는 기계직들이 소속되어 있으므로, 나는 당연히 행정직들이 있는 관리과에 배치되었다. 공무원 생활 20년 중 도로사업소에 있었을 때가 제일 편했다. 사업소 자체가 현장공사 우선이고 관리과는 공사부서를 뒷받침하는 역할이었다. 업무가 단순했다. 업무량에 비해 인력도 넉넉해서 퇴근시간 이후로 일하는 직원이 없.. 주택사업소 근무 내가 희망한 바에 따라 1985년 9월 27일 부산시 주택사업소로 발령이 났다. 치열한 승진전쟁터에서 느슨한 후방부대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총무과장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허 참, 니 거기가면 손해데이...(근데 왜 가냐).” 과장에게야 은원이 없지만 계장에게 미안했다. 나를 인정해주고 주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끌어준 것인데... 하지만 그도 내 입장을 이해하여 주었다. 주택사업소는 시영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고, 분양대금을 징수하는 것이 주기능이었다. 시유지도 관리하고 분양했다. 그때 소장은 건축직이었는데, 내가 오자 반색을 했다. 구청 총무과 출신이므로 아쉽던 행정력을 보강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출세욕이 상당해서 자신이 부각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했고, 그래서 이런저런 과제를 주면서.. 구청 총무과 두 번째 근무지는 중1동사무소였다. 그런데 중1동사무소에 온 지 두 달도 안 되어 해운대구청 총무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통상적인 전보기간, 즉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있는 기간은 2년 이상이었다. 나의 경우 상당히 이례적이었는데 첫 근무지였던 반여2동사무소에서 사무장을 했던 총무과 기획계장이 나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때가 1984년 12월 29일, 2개 동사무소 근무 3년 8개월만이었다. 구청 총무과는 나름 일을 좀 한다는 직원들이 모여 있는 부서다. 기획계, 행정계, 새마을계, 회계계가 있어서 직원들은 30명이 넘었다. 동사무소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동사무소에서는 상관으로 동장과 사무장이 있지만 별로 간섭 받지 않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했다. 그래서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그런데 이곳에선 기안.. 노가다꾼에서 동서기로 1978.5.23. 제대를 하고, 섬유회사와 수출입통관대행회사 등에 얼마간 다녔지만 장래가 없었다. 마침 중동 건설 붐이 일 때여서 알아보니 기능이 없으면 갈 수 없었다. 미장공 육성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두 달 과정의 교육으로는 기능공이 될 수 없어서 노가다판(노동현장)에 들어갔다. 강사였던 미장 오야지(공정별 소사장) 밑에 들어가서 일단 미장 보조 일을 하면서 기능을 익히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2년 정도 굴렀지만 기능공은 되지 못했다. 약속과는 달리 데모도(보조) 일만 시키고 좀체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가다는 괜찮은 직업이었다. 누구의 관섭도 받지 않고 맡은 일만 하면 되었다. 눈치 볼 일도 없고 머리 쓸 일도 없다.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된다. 보수도 적지 않았다. 당시 미장공 일당.. 군대생활 1975. 8. 19에 입대를 했다. 군대는 열등감에 젖어있었던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평등사회였다. 모든 사병이 같은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대우를 받는다. 내가 주로 복무한 데는 논산훈련소 29연대였다.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내가 대학 출신들만 있는 연대본부 인사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조직개편이 된 부대에서 넘어올 때 그 부대 중대장이 추천한 데다 마침 자리 하나가 비어있던 덕분이었다. “니가 부산대 톱 했다고? 연대생이라고? 다 필요 없어. 임 일병만큼만 해.” 인사장교는 업무처리를 제대로 못한 사병을 나무랄 때 늘 나를 들먹였다. 이병에서 일병, 상병, 병장으로 올라가는 것이 사병들의 계급이다. 그런데 우리 내무반에는 병장들의 경례를 받는 일병이 있었다. 병.. 야학교 다니기도 어려웠던 처지 당시 신문배달은 주로 고학생들이 했다. 급료는 야학교의 적은 월사금도 겨우 맞출 만큼이었으나, 시간여유가 많은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 3~4시간 뛰어다니는 배달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배달하는 신문부수, 즉 고객을 늘려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맡은 150여 집 중 신문을 그만 보겠다고 하는 집은 한 달에 네댓은 나왔다. 그때마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돌아서면 부수는 금방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몇 달만 더 봐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억지로 몰래 투입하고 나중에 구독료를 받아와야 했다. 이게 어려웠다. 엄살도 부리고 넉살도 있어서 그런 일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가내..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