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문배달은 주로 고학생들이 했다. 급료는 야학교의 적은 월사금도 겨우 맞출 만큼이었으나, 시간여유가 많은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 3~4시간 뛰어다니는 배달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배달하는 신문부수, 즉 고객을 늘려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맡은 150여 집 중 신문을 그만 보겠다고 하는 집은 한 달에 네댓은 나왔다. 그때마다 “예, 알겠습니다.”하고 돌아서면 부수는 금방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몇 달만 더 봐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억지로 몰래 투입하고 나중에 구독료를 받아와야 했다. 이게 어려웠다. 엄살도 부리고 넉살도 있어서 그런 일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가내공업에서 일을 했다. 나 또래 한 명과 둘이서 집안에서 작업을 하고 주인은 밖으로 나가 영업을 하는 식이었다. 영세하고 빠듯한 수공업이라 급료가 아주 낮았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우리 집 형편에 나도 내 학비뿐 아니라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어느 조선소에 취직을 했다. 배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회사였다. 자재과장의 똘마니로서 현장 직원들에게 공구를 빌려주고 회수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급료는 조금 나아졌지만, 야학교를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야간작업이 있는 날이 많았는데 이때는 나도 남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다 결석까지 자주 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책장을 넘겨야 하는 것이 싫었다. 회사를 그만둘 형편이 안 되므로 야학을 때려 쳤다.
몇 달 후 내가 다녔던 야학 선생님이 경남도청 사환으로 취직을 시켜주어 다시 야학에 나가게 되었다. 도청 내에는 40여개 부서가 있었고 그 부서마다 사환이 있었는데 대개가 야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고학생들에게는 더 없는 직장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애써 취직을 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본래 사환은 정원에 없는 인력이다. 직원들의 일손을 덜고 그만큼 편하고자 데리고 있는 것으로 사환의 급료는 직원들의 여비를 갹출하거나 공동경비에서 마련해서 주었다. 그래서 같은 도청 안이라도 각 부서마다 사환들의 급료가 다르고 여건이 달랐다.
내가 일한 기획관실은 도청에서 제일 바쁜 부서였다. 직원들은 통상 저녁 8시가 넘어서야 퇴근했고, 대통령 연두순시가 있는 연말연시에는 아예 밤을 새우기도 했다. 사환이라고 그냥 청소나 심부름만 하는 게 아니다. 등사를 해서 문서를 만들고 공문을 발송하고 접수하는 일은 매일 정해진 일이었다. 직원들을 도와 단순한 문서작성도 해야 했다. 요즘으로 치면 견습 사원 정도의 일을 한 것이다. 바쁜 부서의 직원들 입장에서 오후 5시가 되면 없어지는 사환이 달가울 리 없었다.
다시 야학교를 그만두고 직장 근처에 있는 합기도 도장에 들어가 샌드백을 두들겼다. 공무원들이면서 어려운 학생이 공부 좀 하겠다는 데 조금만 봐주면 안 되나. 자신들의 편한 것만 생각하는 그들이 야속했다. 다른 부서의 애들은 잘도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나만 이런 처지가 되는가.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한답시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되는 데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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