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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배 고팠던 어린 시절

늘 배가 고팠다. 아침에는 보리밥, 저녁에는 주로 수제비였는데, 그것도 양대로 못 먹었다. 점심은 건너뛰기 일쑤였고. 쌀밥은 설날과 추석 때나 먹어볼 수 있었다. 보리밥은 배가 금방 꺼졌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파할 때면 허기가 왔다. 산복도로 위 우리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왜 그리 멀던지, 집에 와도 점심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1, 2학년 때는 활발했다. 공부가 재미났다. 60명이 넘는 반에서 1, 2등을 했다. 어린 애들도 끼리끼리 어울린다. 공부 잘하는 놈, 주먹이 센 놈, 집이 부자인 놈들이 함께 분위기를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 애들과 어울리면서 잘 난 체하면서 우쭐대기도 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는 1962,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20달러일 때였다. 학교에서는 점심을 굶는 애들에게 강냉이 빵을 나눠줬다. 미국 원조품이었을 것이다. 급식대상은 한 반에 대략 20명 내외로 학기 초에 정했다. “집에서 점심 못 먹는 사람 손 들어.” 하는 담임선생님 앞에서 손만 들면 되는데, 차마 들지 못했다.

 

배고픈 주제에 어쭙잖은 자존심만 있었음이다. 우리 집보다 잘 사는 저놈도 얌체같이 손을 들어 맛있는 빵을 타 먹고 있는데, 내가 차라리 공부도 못하고 눈에 안 띄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린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2학년부터 학교에 내야 하는 기성회비가 생겼다. 1년에 2백 원이었던가. 많은 돈은 아니었으나, 15원이면 콩국수를 사서 온 식구가 한 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우리 집으로서는 큰돈이었다. 당연히 낼 수 없었다. 학년 말이 되자 학교의 압박이 심해졌다. 못 낸 애들은 한 반에 10명 정도였는데, 며칠 간격으로 교단에 불려 나와 언제까지 낼 것인지 약속을 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약속은 거짓이 되고 이게 반복되자 수업 중에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쫓아내기도 했다. 집에 가봤자 답은 뻔하므로 중간에서 되돌아와 또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그때의 담임선생님은 통신표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학기 초와는 달리 아동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보입니다...”

 

기성회비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내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게 끔찍했다. 공부도 싫어졌다. 3학년 때인가, 책가방을 메고 나와 학교에 가지 않고 산이나 사람들이 없는 데서 시간을 보냈다. 요즘 같으면 금방 들통이 났을 것인데, 그때 그 시절인지라 4, 5개월이 지나서야 학교에서 연락이 오고해서 집에서 알게 되었다.

 

펄펄 뛰며 체벌을 하는 엄마도, 날품팔이를 하는 아버지도, 세상도 원망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으나 우등생은 옛말이 되었다. 숙제를 안 해가서 체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냥저냥 4학년과 5학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었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야 들어갈 수 있었고, 오늘날의 대학처럼 1, 2, 3류 중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1류 중학교에 몇 명이나 붙었느냐가 그 학교의 평판이 되었고 학교 간 경쟁이 치열했다. 6학년 담임은 아이들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수시로 시험을 봐서 틀린 문제 수만큼 손바닥을 두들겼고, 매일 많은 숙제를 내어주고 안 해오면 무지막지하게 빳다를 내리쳤다.

 

매타작을 피하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몇 년간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1차 시험은 1류 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2차로 2류 중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회비를 못 내어 졸업식에도 못 간 처지에 중학교 입학금이 있을 리 없었고, 이로써 내가 받은 정규교육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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