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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식당꼬마

6·25 때 우리 국군은 겨우 끼니를 때우면서 굶주렸는데 반해 포로들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국군은 가난한 나라의 소속이고, 포로수용소는 잘 사는 나라의 유엔군이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내 처지가 그러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고아원 애들이 반에 한 둘은 있었는데, 그 고아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차라리 내가 고아였다면 굶지도 않고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다녔을 것인데,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신세를 비관하면서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마냥 암담한 날을 보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석 달이나 되었을까. 음식점에 취직이 되었다. 굶지 않고 밥은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5부두 주변 철도청 부지 내에 있는 구내식당이었는데, 철도청 직원들과 운수회사 직원들이 주로 이용했다. 음식을 나르고 청소를 하고 잔심부름도 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급료는 거의 없었다. 그저 먹는 입 하나 덜자고 보내어진 꼬마 머슴이었다.

 

어른들의 일상이 엿보였다. 구내식당이라서 손님들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인성과 생활형편까지도 짐작되었다. 공무원들은 직위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같은 직급이라도 맡은 업무에 따라 씀씀이가 달랐다. 운수회사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큰 회사와 작은 회사, 맨투맨으로 뛰는 사람들, 각각 그 스타일이 다르고 수입도 다른 듯했다.

 

일정한 구역과 틀 안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 업에 뛰어들었을까, 나도 어른이 되면 이들처럼 생활인의 한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느날 낮선 손님이 왔다. 사십 대나 되었을까. 나를 보더니 느닷없이 나무랐다. “니는 임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왜 이런 데 있노. 굶더라도 어디 가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얼마간 돈을 쥐어줬다. 뿌리쳤다. 그리고 엎드려 펑펑 울었다. 우리 주인은 어느 미친놈이 괜한 애를 울렸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었다. 아니, 그도 현실적인 생활인일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단골손님들도 마찬가지다. 남의 일에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없기에 그냥 외면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 낮선 손님은 미친놈임에 틀림이 없다.

 

며칠 후 무작정 뒤쳐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2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광고를 보고 중학교 과정의 통신강의록을 신청했다. 그때의 통신강의는 이름만 그렇지 다른 매개는 없고 참고서 내용의 인쇄물을 매달 분할해서 보내줄 뿐이었다.

 

생판모르는 영어와 수학은 혼자 풀기 어려웠다. 양주동 박사가 독학할 때 삼인칭 단수가 뭔지 몰라 몇 백번을 읽어도 모르겠더라했던 바로 그 짝이었다. 부족한 시간에 진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다가 국회의원이 설립한 야학교에 입학했다. 하루 4시간씩, 저녁 6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났다. 정규학교에 비해 턱 없이 부족했지만 과목마다 선생이 바뀌면서 가르쳐주는데, 너무 쉽고 재미가 있었다. 몇 달 후 첫 시험에서 모든 과목에서 1등을 했다. 급우들이 놀라고 나도 놀랐다.

 

담임선생은 바로 나를 급장으로 지명했다. 급우들 또한 대개 없는 집 애들이라서 국민학교 과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나 거의가 낮에 빡빡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있었던 데다 신문배달을 할 때라서 시간 여유도 많았던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쓸데없는 우월감과 자존심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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