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기억은 경남 마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집 가까이 회원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반대편 갯가에는 큰 고목이 있었다는 것을 떠 올릴 수 있으므로, 현재 지명으로 보면 경남 창원시 마산구 회원동이 되겠다.
10여 년 전 혼자 무학산 산행을 마치고 지나는 길에 옛집을 찾아보았으나 골목길이 낯설어서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마산에서 부산으로 옮겨오게 된 것은 6, 7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도박에 빠진 아버지는 매번 월급날이면 집에 오지 않았고 다음날에 항상 빈털터리로 왔다. 어느 날도 몽땅 잃었는데, 사기를 당했다고 여겼는지 분에 못 이겨 어느 집에 불을 지르다 발각되었다고 했다. 그 죄로 감옥살이를 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동네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맨몸뿐인 가족들은 달리 방안이 없어서 부산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의탁하게 되었다.
다른 기억은 없고 부산으로 올 때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아버지 얼굴과 큰아버지에게 엄청나게 야단을 맞던 아버지의 모습, 그 장면만 스크랩된다.
아버지는 아주 왜소했다. 난장이를 겨우 면한 정도였다. 1미터 50이나 되었을까. 이러한 신체에다 남루한 차림에 날품팔이와 다름없던 노동자였던 아버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그 아버지와 다름이 없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콤플렉스 중의 하나였다.
1916년에 태어난 우리 아버지는 주물 기술자였다. 펄펄 끓는 쇳물을 부어 가마솥도 만들고 했으니 요즘 하는 말로 극한직업이었던 셈이다. 보수는 상당히 좋아서 웬만한 사무직의 몇 배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가 오히려 좋았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기술자를 우대했고, 급여 날이면 사장 아내가 쟁반에 급여봉투를 담아 바치듯이 주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징용도 피한 듯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물러가고 그 자리를 약삭빠른 한국 사람들이 차지했다. 급여도 제때 주지 않고 금액도 약속과 달랐다. 아마 해방 후 혼란기 탓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우직했다. 경우에 어긋나는 건 못 참았다. 나이가 들어 경노당에서도 곧잘 싸우고 나왔던 아버지다. 매번 약속을 어기면서 기술자를 무시하는 사장들 아래서는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익숙한 직업을 버리고 행상도 해보고 다른 일들을 하면서 우리 집은 가난해졌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 융통성 없는 우직함, 어설픈 정의감, 어쭙잖은 자존심 따위일 것이다. 게다가 극빈했던 집안 형편에서 생겨난 열등감이 더 해졌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군대에 들어가고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옅어져 갔다. 애써 떨쳐버리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이 어디로 갈까. 지금도 그 일부가 내 속에 숨어있으리라.
그래도 아버지는 우둔하지는 않았다. 배운 문자가 많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은 없었지만 총기는 넘쳤다. 부지런하기도 했다. 엄마 역시 근면했고 매사가 분명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빈한했으되 동네에서 어른 노릇을 했던 선비였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남이 싫어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건 죽기보다 싫어했다. 내 인성도 이러한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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