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 8. 19에 입대를 했다. 군대는 열등감에 젖어있었던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평등사회였다. 모든 사병이 같은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대우를 받는다. 내가 주로 복무한 데는 논산훈련소 29연대였다.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내가 대학 출신들만 있는 연대본부 인사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조직개편이 된 부대에서 넘어올 때 그 부대 중대장이 추천한 데다 마침 자리 하나가 비어있던 덕분이었다.
“니가 부산대 톱 했다고? 연대생이라고? 다 필요 없어. 임 일병만큼만 해.”
인사장교는 업무처리를 제대로 못한 사병을 나무랄 때 늘 나를 들먹였다.
이병에서 일병, 상병, 병장으로 올라가는 것이 사병들의 계급이다. 그런데 우리 내무반에는 병장들의 경례를 받는 일병이 있었다. 병장들보다 고참이었지만, 측정에 통과하지 못해서 진급을 못했던 것이다. 측정은 규정 암기, 제식, 사격, 던지기, 구보의 다섯 과목인데, 통상 사격과 구보에서 많이 떨어졌다. 뚱뚱해서 구보를 못했다던가.
이 고참은 내 작은 키를 두고 자주 놀려댔다.
“어이, 임 일병. M1을 메고 있응께 니 키하고 총 길이가 같다야. 아하하.”
그는 끝내 일병 계급장을 달고 제대했다. 그러나 나는 측정 때마다 문제없이 통과했고 동기들보다 진급도 빨리했다. 그래서 병장으로 제대했다.
“이놈의 새끼들이 군기가 빠졌어. 모두 집합, 잔밥 순으로 일렬로 정렬!”
내무반장이 몽둥이를 부여잡았다. 줄빳다를 칠 기세였다. 우리 내무반에는 배운 놈들과 못 배운 놈들이 섞여 있었다. 연대본부 행정병들은 나 빼고 모두 대학 출신들이고, 세탁소, 이발소, 목공소 등은 못 배운 이들이 많았다.
그때 내무반장을 비롯한 최고참들은 목공소와 이발소 사병들이었고, 그다음 서열이 연대본부 행정병들인 우리 동기들이었다. 최고참 바로 아래 중고참이었던 셈이다.
내무반장은 단순무식 했고 사리판단에 어두웠다.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군대지만,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입대한 순서대로 한 놈씩 엎드리라고 하는데 반발심이 솟구쳤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내 옆에 서 있었던 동기 하나가 나섰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잘하겠습니다.”
“엎드려! 못 엎드려! 이 새끼 봐라, 지금 반항하는 거냐.”
동기는 내무반장을 부여잡고 애걸복걸했다. 졸병들이 쭉 늘어서 있는 중에 실랑이가 길어지면 체면만 손상된다. 결국 내무반장은 몽둥이를 내던졌다.
“이놈의 새끼들, 그래 좋아. 이번만큼은 봐 준다. 똑바로 해!”
속으로 감탄했다. 아하, 저런 방법도 있었네. 좋은 환경에서 공부만 하다 온 저 친구는 저렇게 하는구나. 흥분했던 내가 나섰다면 정면으로 대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참도 물러설 수가 없다. 그야말로 파국이 될 뻔했던 일을 동기가 나서서 순리적으로 해결했다. 싹싹 비는 형식을 취했지만 우리들의 승리였다. 그 이후 고참들은 섣불리 몽둥이를 들지 못했다.
직속상관인 본부중대 중대장이 가짜휴가증을 요구했다. 자기가 관리하는 P.X병에게 주말마다 외출을 보내주었는데, 외출증으로는 위수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휴가증을 발급하는 인사과의 고참인 내게 부탁한 것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면 인사과장 몰래 직인을 찍어야 한다. 상관을 속이고 허위문서를 만드는 일이다. 중대장은 다른 곳에서 트집을 잡았다. 인사과 담당구역의 청소 불량을 구실 삼아 매일같이 나를 불러 구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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