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5.23. 제대를 하고, 섬유회사와 수출입통관대행회사 등에 얼마간 다녔지만 장래가 없었다. 마침 중동 건설 붐이 일 때여서 알아보니 기능이 없으면 갈 수 없었다. 미장공 육성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두 달 과정의 교육으로는 기능공이 될 수 없어서 노가다판(노동현장)에 들어갔다.
강사였던 미장 오야지(공정별 소사장) 밑에 들어가서 일단 미장 보조 일을 하면서 기능을 익히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2년 정도 굴렀지만 기능공은 되지 못했다. 약속과는 달리 데모도(보조) 일만 시키고 좀체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가다는 괜찮은 직업이었다. 누구의 관섭도 받지 않고 맡은 일만 하면 되었다. 눈치 볼 일도 없고 머리 쓸 일도 없다.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된다. 보수도 적지 않았다. 당시 미장공 일당이 1만 2~3천 원 정도, 우리 같은 데모도는 하루에 5천원을 받았다. 말단 공무원(1980년 기준 월급 8만원)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능공의 길은 요원했다. 현장을 알고 보니 오야지에게 약속을 추궁할 수도 없었다. 아마 오야지도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교육을 하면서 눈 여겨 봤던 수강생 몇 이를 골라 자기 일꾼으로 썼던 것이다. 그런 오야지도 그 바닥에서는 신용 있는 사람으로 이름 나 있었고 일꾼들에게도 양심적으로 대한 좋은 사장이었다. 나는 세상일을 너무 몰랐다.
중동 경기도 시들해지고 이대로 세월만 보낼 수 없었다. 학벌이 없어 좋은 직장은 구하기 어렵고 성격상 영업직은 죽어도 못한다. 공무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공무원 시험은 학력 제한이 없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 어쭙잖은 회사에 들어가서 굽신거리는 것보다 월급은 적지만 공무원은 말단이라도 소신대로 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단기속성 학원에 들어가 공부에 집중했다. 공백 기간이 길었으나 옛날에 공부한 가락은 있어서 1년 만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도 합격했다. 대기기간을 거쳐 1981.4.1. 공무원 발령을 받았다. 제대한 지 3년 만이다.
첫 발령지는 해운대구 반여2동사무소였다. 이른바 동서기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람을 못 찾아 입영통지서나 훈련통지서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병역기피자도 흔치 않았다. 부정부패도 있을 때라 병무청에서 1년에도 몇 번씩 감사를 왔고 그때마다 많은 지적을 받곤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업무를 직원들은 서로 맡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맡게 된 병사업무였는데 이 일을 담당하면서 업무체계를 일신했다. 밤늦게 5개월을 노력해서 입영대상, 방위대상, 예비군 등 15,000여 명의 명부를 별도로 만들었다. 대상자들을 명확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병무청에서 나온 감사반장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우리 동장을 불러 앉혔다.
“동장님, 내가 기분이 참 안 좋습니다. 지적할 게 하나도 없다 아입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자원을 확실하게 관리하고 있는 데는 처음 본다고 감탄을 거듭했다.
곧 병무청에서 불러 표창장을 주고 모범사례 발표를 시켰다. 다른 동 직원들이 와서 견학도 했다. 동장은 기회를 활용했다. 지역유지들을 부추겨 표창패를 만들어 내게 수여하는 한편, 지역방위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걸쭉한 야유회를 개최했다. 자신의 조직기반을 강화한 것이다.
새마을 업무를 볼 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업무는 태반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사람과의 관계도 미숙했고 친화력도 없었다. 게다가 우선 내 자신이 국민교육이니 무슨 대회니 하면서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 행사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때 우리 동장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임 서기, 새마을(업무)은 통장들을 휘어잡아야 한데이, 어느 누구는 참 잘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