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희망한 바에 따라 1985년 9월 27일 부산시 주택사업소로 발령이 났다. 치열한 승진전쟁터에서 느슨한 후방부대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총무과장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허 참, 니 거기가면 손해데이...(근데 왜 가냐).”
과장에게야 은원이 없지만 계장에게 미안했다. 나를 인정해주고 주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끌어준 것인데... 하지만 그도 내 입장을 이해하여 주었다.
주택사업소는 시영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고, 분양대금을 징수하는 것이 주기능이었다. 시유지도 관리하고 분양했다. 그때 소장은 건축직이었는데, 내가 오자 반색을 했다. 구청 총무과 출신이므로 아쉽던 행정력을 보강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출세욕이 상당해서 자신이 부각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했고, 그래서 이런저런 과제를 주면서 일을 많이 시켰다. 명절 때도 출근해서 나를 불렀다. 직원들은 그런 소장을 못마땅해 하는 한편, 나를 권력층에 빌붙은 간신을 보듯 했다.
서너 달이 지나고 내가 특별한 인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원들의 적의는 사그라졌다. 이어서 소장도 바뀌고 나자 담당업무는 한가했다. 하지만 곧 전에 없었던 일이 터졌다. 당시 일부 시영아파트는 분양금을 7년간 분할해서 받고 있었는데, 제대로 납부하는 세대가 드물었다.
이것을 어느 국회의원이 민원차원에서 제안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 7년간 분기별 납부를 19년간 매달 납부로 바꿔야했고, 한 가구의 상환횟수를 28회에서 228회로 늘여야했다. 문제는 몇 천 세대의 상환금액이 모두가 제각각이라 집집마다 달리 계산을 해야 했다. 매월 원금과 이자금액도 달랐다. 수작업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오류도 발생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문한 결과 전산처리용역이 답으로 나왔다. 그때는 고지서도 손으로 쓸 때라 전산이란 게 생소했다. 직원들은 몸을 사렸다. 그런 예산도 없는데 돈을 들이면 나중에 감사에 걸린다는 것이다. 내가 총대를 메었다. 먼저 시청 전산담당관실에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타 부서 일을 애써 해 줄 리는 만무했고 예상했던 바였다.
명분과 자료를 축척해 놓고 다른 예산을 당겨썼다. 용역사업은 무난하게 마무리되었고, 내가 주택사업소에 근무했을 때는 물론 그 뒤로도 감사에 지적되었다거나 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때 과장은 나를 특별하게 신임했다.
‘장포대’라는 말이 있다. 장군을 포기한 대령이라는 것이다. 진급은 막혔고 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막판에 직속상관도 섣불리 간섭을 못하니, 염치도 없이 온갖 패악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사업소에는 진급을 포기한 고참 계장들이 많았다. 우리 계장도 그랬다. 일은 뒷전이고 돈만 밝혔다.
나도 청렴결백하지는 않다. 일이 끝난 후 인사치례로 돈을 주면 받았다. 그렇지만 은근히 바라거나 요구하지는 못했다. 소심하고 고지식한 성격 탓이다.
“이봐라. 갯가 돌맹이는 니가 들어내는데 가재는 왜 딴 놈이 잡아 가노.”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계장에게 정면으로 반발했다.
“이게 어데서 쬐그만 게 독사같이 대가리를 처 들고 대느노. 니가 뭐꼬.”
갈등의 골은 깊어져갔다
그러다가 1988년 2월 5일 도로사업소로 발령이 났다. 계장은 못된 직원을 보내서 좋았겠고, 나는 그런 계장에게 벗어나서 홀가분했다. 후일에 들었는데, 계장이 시청 인사과 인맥을 동원해서 나를 보냈다고 했다. 그걸 알고 과장과 계장이 대판으로 싸웠고, 소장도 계장을 불러 엄청 야단을 쳤다나 뭐라나. 그래봤자 상황의 변화는 없다. 세상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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