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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

딸 이야기(2)

아빠, 내 무시하지 마라. 나도 상위권이다!”

내 눈앞에 성적표를 흔들면서 딸은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를 쳤다.

이 자슥이 말버릇하고는, 뭔데?”

헤헤, 잘못 했써요. 아빠가 나를 깔보니까 그렇지. 내 이번에 우리 반에서 13등 했거든요.”

으음~, 13? 조금 한 거네. 물론 아빠는 1, 2등만 했지만...”

 

나는 고등학교니까 한 반에 5~60명은 되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성적표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13/39", 39명 중에 13등을 한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중하로 나누면 어쨌거나 상위권에 드는 셈이니까.

 

대학입시를 앞두고 딸은 유아교육과를 가고 싶어 했다.

, 유치원선생? 그거 D업종이고 극한직업 아니냐. 그러지 말고 적당한 데 다니다가 시집이나 빨리 가라.”

나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딸은 동아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택했다. 그러고선 재학 중에 유치원실습교육을 다녔고, 졸업을 하자 유아원 교사 응시원서를 들고 와서 봐달라고 했다.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종이접기, 풍선불기, 아트글씨쓰기 등 잡다한 교육과정의 수료증이거나 자격증이 붙어있는데, 무려 열대여섯 개나 되었다.

하하, 이게 다 뭐냐, 이런 쓰잘데 없는 거 딴다고 아빠 몰래 돈 많이 갖다 줬구나.”

뭐어. 다 필요한 거다. 그라지 마라. 아빠는 모르면서...”

 

놀러 갈 곳, 재미 난 곳 다 돌아다니면서 아무 걱정도 없는 듯이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다닌 딸이었지만 나름 목표를 정하고 준비해왔던 것이었다.

 

유아원은 대부분이 사설이었고 과연 교사 처우는 열악했다. 근무시간도 길었고, 교실 청소 등 온갖 잡일도 해야 했다. 그래도 딸은 지가 좋아하는 일이라 즐겁다고 했다. 집에 와서까지 교재를 준비했고 행사가 있을 때는 장식물도 정성스레 만들어갔다.

 

아빠, 우리 원에서 교사 한사람을 빼야하는데, 나는 걱정 없다. 우리 원장님이 내가 제일 잘한다고 했거든.”

그으래? 그렇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나. 잘하는 사람 짜르고 못하는 사람 써야하는 사정도 있는 거다.”

에이, 아니다. 아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그래, 그렇지만 만약에 말이다. 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항의하거나 그러지 말아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그쪽 사회에서 니 평판이 되는 거니까.”

 

자신만만했던 딸은 내말에 승복하지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딸은 그 유아원에서 나오게 되었다. 아마 원장의 입장에서 일은 잘 못해도 생계대책을 호소하는 교사를 차마 내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딸은 몇 군데 유아원을 옮겨 다니면서 세상을 배워갔다.

 

가정관리학과 졸업으로는 유아원에만 갈 수 있고, 유치원 교사가 될 수 없었다. 딸은 유치원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전문대학(부산여대, 야간)에 다녔다. 유아원에서 퇴근하고 야간수업에 통학했는데, 대중교통이 너무 불편하다해서 소형차를 사 주었다. 능숙치 못한 운전 실력으로 야밤에 번잡한 도심을 다녔으니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래도 우리 딸은 마냥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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