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과 발령
1993년 1월 9일 청소과로 발령이 났다. 시청에 들어온 지 1년 3개월만이다. 비상대책과에 있을 때 주사보(7급)가 되었지만 청소과에 들어가자 시선이 달랐다. 일을 좀 하는 직원이 왔다는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내 평가표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과는 손꼽히는 격무부서였다. 연말 각 과에서 종무식을 벌이면 시장은 격무부서 몇 군데를 돌면서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때마다 교통기획과와 청소과는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과에서 나는 6년 7개월을 보냈다. 시청 직원들은 통상 3년 내외로 부서를 옮긴다. 나처럼 한곳에서 오래 근무한 기록은 시청 내를 통틀어도 드물지 싶다.
청소과는 쓰레기 처리를 담당하는 청소행정계와 분뇨처리를 하는 오수분뇨계, 쓰레기 매립장 건설을 하는 청소시설계가 있었다. 우리 과장은 그의 나이 많은 아버지가 아들이 청소과장이 되었다고 하자 무척 실망을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시각과는 달리 청소업무는 대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다.
도시 3대 업무에 상수도와 교통문제가 더 있으나 상수도나 교통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길게 호흡을 잡고 실행되는 것인데 비해, 청소는 매번 처리해야 할 현안이 발생하고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내가 청소과에 들어간 그즈음 석대매립장이 막혀서 난리가 났고, 매립장을 막고 있는 주민들과 협상하려고 간 부시장이 감금당하기도 했다.
청소과에서 처음으로 배치된 곳은 오수·분뇨계였다. 처리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뇨수거료 인상 건과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 분뇨이송관 설치사업이었다. 두 업무를 동시에 처리해 나갔는데, 분뇨요금 인상이 먼저 종결되었다.
그때 분뇨처리업체, 즉 정화조 수거업체는 24개쯤으로 기억된다. 관련 장비와 인력, 부지 등을 갖추고 허가를 취득한 업체들이다. 다른 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업계의 기득권이 질시가 되어 5년 동안 수거료가 동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나라 경제가 한창 성장기라 매년 물가도 치솟았다. 업계에서는 50%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철되지 않으면 수거를 중단하는 등 단체행동을 하겠다고 했다.
전임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른 부서로 달아났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응해야 할 대상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분뇨수거 업계다. 원하는 만큼 올려줄 수는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봐야 했다. 또 한군데는 부산시 물가대책위원회다.
분뇨수거료는 공공요금이다. 물가대책위원회에서는 요금인상 건이 올라오면 시민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낮추려고 한다. 내가 올린 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업계에 대해서는 구획별 청소에 따른 이득을 상쇄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정화조 청소는 1번에 1번씩 한다. 종전에는 전년도에 청소한 날짜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청소했다. 그러다보니 반여동에서 한 집을 청소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재송동으로 차량을 이동해서 또 한 집 청소하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한 것을 반여동 어느 지역에 있는 모든 정화조를 한 번에 청소하는 것이 구획별 청소다. 시간과 인력, 차량운용구간이 줄어들게 되어 처리비용이 엄청 절감된다. 이 방식은 내가 담당하기 전에 연구용역으로 나와 있었던 것인데, 계획은 내가 짜고 시행했다.
그때 수거료를 얼마 올려주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15%쯤이 되었을 것 같다. 물가대책위원회에서 수정 없이 무난하게 통과했고 업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수긍했다. 수거료 인상이 결정되자 우리 계장은 업계에서 주더라면서 양복 한 벌 값을 내게 건넸다.